단군세계 > 단군의 사상과 철학> 개물교화론(開物敎化론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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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 풍류도 08. 귀일론 12. 단군과 현묘지도    
 
단군의 개물교화론(開物敎化론論)
   
    虛極 靜生 靜極知滿     知極德隆也
    故虛聽以救 靜以 矩 知以理物 德以濟人此乃 神市開物敎化爲

    빈 것이 지극하면 고요함이 생기고,
    고요함이 지극하면 아는 것이 가득하고
    아는 것이 지극하면 덕이 높아지느니라.
    고로 빈 것으로 가르침을 듣고 고요함으로 남을 헤아리고
    아는 것으로 사물을 다스리며,
    덕으로 인간을 구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시의 개물 교화이니라     - 고구려국본기대변경 -

위의 말씀은 고구려를 세우신 고주몽 성제께서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려 말씀하신 내용 중 가려 뽑은 것이다.


(1) 빈 마음으로 가르침을 받으라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신앙인 들에게도 참으로 어려운 과제가 아닌가 한다.
마음을 미울 수만 있다면 그가 바로 참 도인이요, 훌륭한 신앙인이다. 세상에서도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비울 수 있을까 ? 흔히 마음을 크게 비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크게 욕심을 부리고 부린 욕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날로 거칠어져 가고 있다.

한얼이 주신 참성품(眞性)의 자리는 비어 있는 자리이지만 알고 보면 가득 찬, 무엇이든지 풍요함이 넘치는 자리이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모든 것을 가진 자리는 알고 보면 아무것도 갖지 못한 허망한 자리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흔히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얼만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설령 가졌다면 언제까지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

가장 큰 권세를 누린다 한들 수십년을 눌릴 수 있는가 안 놓겠다고 몸부림칠수록 그물에 걸린 짐승처럼 더더욱 꽁꽁 묶이어 고통을 당하지 않는가 우리 근세의 한국 역사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가장 높은 권세를 지녔던 대통령들의 최후가 어떠했는가 외국의 망명 생활로 고통을 받았고 아끼던 부하에게 저격을 받았는가 하면 감옥 속에서 신세를 한탄 해아 하는 가련한 신세를 면치 못했다. 엄청난 부(富)를 누리던 사람들도 그 재산을 수백년 누리지 못했고 죽을 때 가져가지도 못했다. 살아가면서 생생히 보는 일들이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은 계속 그 무지의 함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한얼을 향한 신앙의 완성이요, 도인의 도를 이루는 성도(成道)의 길이 아닌가 한다.
장자는 허공생일(虛空生日)이라 했다. 텅 빈방은 태양을 낳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마음을 비울 때 한얼의 가르침이 바르게 전달 될 수 있다. 주시는 이와 받는 이가 하나됨이 신인합일(A人合一)이요 반진귀일(反眞歸一)이 된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빈 마음에 찾아와 주시는 한얼의 보배로운 대덕 대혜 대력의 은덕이 가득 채워져 참으로 만족한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

  단군 한배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비어진 공아(空我)의 자리는 모두가 임하여 채워지는 자리요, 그 채워진 자리는 나를 생각지 않는 만인의 자리이다. 즉 공의(公義)의 자리이다. 무리에 처하여 자기를 가장 수고롭게 하고 무리들을 후하게 하고 무리들의 고통을 내가 홀로 당한 듯 더불어 괴로움을 나눈는 자리이다'라고 하시었으니 이는 신시시대의 군자들이 가졌던 성스러운 마음의 자리이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는 자리에 서게 된다. 어리석은 이는 자기 것을 만들고 찾고 구하지만 한얼에 속한 이는 자기를 계속 비우고 버리는 자리를 찾아간다. 결국에는 자기마저도 없는 무아의 자리에 이르게 되니 그 자리는 바로 성통이 있고 완성된 한얼 사람의 자리, 즉 신인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2) 고요히 남을 헤아리라

  빈 마음을 지극히 하면 고요함이 생(生)한다 했다. 빈마음을 찾기 위하여 삼법(三法)으로 깊은 수도에 든다. 그 속에 고요함이 깃들어 자기를 본다 자기를 본 후에야 남이 바로 보인다.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하면 남이 보일리 없다. 그러므로 성자(聖子)들은 자신을 알라고 했다.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때 내게 비추인 상대를 볼 수 있다. 자기를 보고 자기를 아는 공부가 첫째 공부이다.

지리산에서 깊은 수도를 하신 양씨성을 가진 도인이 계신다. 그분 말씀에 따르면 단군 할아버지가 성령으로 계시는데 늘 자기 몸 속에 와 계신다고 한다. 자기 몸 속에 한배검님의 성령이 임하게 하는 일이 신앙에 가장 기본이라고 하신다. 그 분이 하시는 공부의 방법은 반평 정도의 거울을 앞에 두고 뚫어지도록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수십년을 그렇게 고요히 앉아 자기를 보는 공부를 하셨다고 한다. 될 수 있는 한 옷을 가볍게 입고 '내가 누구인가' 고요히 자기의 모습을 보느라면 깨우침이 온다는 것이다.

출렁거리는 물에는 사물이 비추이지 않지만 고요한 호수에는 비추어진 사물의 모습이 뚜렷이 보인다. 우리의 마음을 고요히 하고 참 성품을 보자 나를 헤아려 보고 나와 함께 한 이웃을 헤아려 보자 앞사람을 헤아려 보고 뒤에 도는 사람을 헤아려 보자. 가장자리에 서 있는 옆 사람도 헤아려 보자.

내가 가진 재주가 있다면 남에게 베풀라는 재주요, 내가 가진 모든 소유는 결국 모두를 위하여 홍익하라는 하늘의 맡기심임을 헤아려야 한다. 이기주의에 빠져 자기마저도 잊어버리고 아득함에 잠기는 미혹을 벗어나야 한다. 인간은 모두가 태양처럼 자기 빛을 낸다. 더 광명한 빛을 발 할 수 있다. 자기의 빛이 태양처럼 환하게 떠오르게 하자 그리하여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發)하자. 위대한 태양을 뜨겁게 빛내자.


(3) 아는 것으로 만물을 다스리라.

  고요함이 지극하면 아는 것이 가득해진다 했다.
그렇다. 고요함 속에 한얼의 대혜가 깃들인다.
21세기는 정보화의 시대라 한다. 첨단 정보를 누가 먼저 확실히 많이 알고 있느냐가 곧 경제적 가치로 나타난다. 아는 것은 만물을 다스리는 힘이다. 지식은 힘이요 돈이다. 예로부터 큰 부자는 한울이 낸다 했다. 그 말은 한울이 알아야 큰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한울과 통해야 하고 알아야 하고 한얼이 재물을 주셔야 쌓을 수 있다는 말이다.

복을 받는다는 것은 재물과 직접적 관계가 있다. 종교와 재물이 관계없어 보이나 사실 그렇지 않다. 깊은 정성은 고요함이 생기고, 지혜가 생긴다. 그 지혜속에 재물이 생긴다. 하느님은 온 만물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한울에 빌면 주신다. 흔히 기복신앙(祈福信仰) 운운하는데 기복신앙이 그릇된 것이라고 할 수 만은 없다.

인간은 한얼에 대한 정성을 잊음으로 고요함을 알지 못하고 지혜를 잃어 버렸다.
만물을 다스리는 지혜조차 잃었다. 다스리는 지혜는커녕 계속 만물(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결국에는 인간의 생존마저 위협받는 위기에 처해 있다. 돌이켜 고요함의 지혜를 얻으면 만물을 다스리는 축복을 받을 수 있다. 만물을 다스리는 자는 복 있는 자이다. 복 있는 자는 고요히 정성을 다한다. 지혜가 생기면 만물을 다스리는 이치가 터득된다. 만물을 다스리는 지혜가 생기면 세상은 풍요한 천궁이 된다.


(4) 덕으로 사람을 건지라

  아는 것이 지극하면 덕이 높아진다고 했다.
높아진 덕은 세상을 구제하는 힘이 된다. 덕은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다. 모습 없이 모습 하심이 덕이 행 하여 지는 곳에 드러나는 것이다. 맹자님께서는 '덕행인자왕(德行仁者王)'이라 하셨으니 '덕으로 사랑을 행하는 자가 왕'이라는 말씀이다. 덕을 행하는 이가 가장 큰 자요, 가장 위대한 자라는 말씀이다. 작은 권세를 부리는 자는 소인(小人)이요 속인(俗人)이다. 덕을 베풀어 세상 사람을 구제하는 이는 왕 같은 위엄을 갖춘 자요, 왕과 같은 영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자이다.

덕을 쌓는 다는 것은 사람을 건지는 근본이요, 자기르 찾고 천궁을 이루는 귀한 요소가 된다.
덕을 갖추지 못하면 사람을 구제 할 수 없다. 물에 빠진 자가 어찌 물에 빠진 자를 구제할 수 있으랴 덕으로서 사람을 건지자 ! 그리하여 우리 모두 세상을 사랑하고 한얼의 사랑을 받고 왕과 같은 존귀함을 누리자 ! 고주몽 성제의 가르침을 빛나게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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